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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한계 | 김춘식 목사 | 2021-11-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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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한계 [고린도전서 6:12]
[암송구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김영한 박사(샬롬나비 대표, 숭실대 명예교수)는 ‘문화 마르크시즘 (프로이트막시즘)은 성해방의 탈 쓴 오늘날 전체주의 사상’을 발표하면서 네오-마르크시즘은 혁명을 방해하는 기독교, 국가, 가정의 장벽을 서서히 허무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회 각계 각층에 진지(陣地)를 구축해 제도권 문화 장악을 통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계속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 밀려들어오고 있는 문화 마르크시즘 (Kulturmarxismus)은 섹스 혁명, 동성애 운동, 남녀 구분을 철폐하자는 젠더 이데올로기, 급진적 페미니즘, 성정치학, 퇴폐적 다문화주의, 가정 파괴 각종 퇴폐 영화와 TV 드라마, 교회 비리 폭로를 통한 반기독교 사상 주입 등 다양한 사회정치문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도 바울은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이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구속함은 그 모든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 이었다.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인생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진리다.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상황들은 당시 도시의 영향에 의한 것들이었다. 헬라의 도시들에서는 소송 음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 술 취함 후욕 토색 등을 마치 오락처럼 행하는 저주스러운 어두운 그림자가 서신에 보인다. 헬라의 소피스트 Protagoras [BC 490?]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다” 는 그의 말 속에 무신론자들의 자유 개념이 잘 표현되어 있다. 헬라 철학이 모든 것을 법적으로 자유를 선언 할 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합법적) 그러나” 하면서 무신론자들의 이 자유에 대한 개념을 수정한다.
1. 모든 것(ραντα) 이는 헬라어의 복수형으로서 단순한 의미는 모두(all)이다. 첫째로 “모든 것”이라고 한 말씀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헬라 철학은 장래의 일들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것에 장래의 일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 3:21-22].
2. 가하다 [Lawful]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씀 속에서 “가하다(합법적이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고전 2:15]는 말씀은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이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 위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첫째로 무한하신 하나님, 그리고 다음에는 그리스도,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이다. 인간이 모든 것들 가운데 중심에 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판단해야 한다는 중대한 원리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8:6, 10:31]. 이 말씀이 빈약한 헬라의 철학을 뛰어 넘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지켜야 할 우주처럼 넓은 중대한 진리이다.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자들의 관계가 있음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의 한계는 세 단계에서 찾을 수 있다.
1] “모든 것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유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가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들이 가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무력한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유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2] “가하다는 것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내게 모든 것이 가하나 내가 주인이 아니다”는 이 원리에 의하여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 재물, 지식, 사랑과의 관계다. 죄는 법에 따라 심판한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죄 짓는 곳에 사용했을 때 그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 죄의 노예가 된다. 저와 여러분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자가 안전하다. 이 관계가 깨어진다면 위험하다.[12]
3] “가하나 모든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자유의 한계가 있다. 우상의 제물을 쉽게 먹어서는 안 된다. 믿음 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한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전 8:12-13]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지식 소유 건강 능력 언행심사 취사선택 할 수 있는 그 자유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를 망하게 하는 일을 위하여 자유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을 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지키는 것이 광활한 자유 안에 사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여 보십시다. 1. 네오마르크시즘이 적으로 생각하는 세력들은 무엇들입니까? 2. 문화 마르크시즘이 주장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3. 헬라의 철인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4.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무엇들입니까? 5.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의 한계는 어디에서부터 입니까? 6.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는 무슨 의미입니까? 7. 모든 것이 가하지만 왜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까? 8. 자유를 죄 짓는 곳에 사용하면 결과는 무엇입니까? 9. 우리가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10. 우리가 자유를 사용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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